다이후쿠 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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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후쿠 밀약은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가 구속된 후 미키 다케오 총리의 퇴진 압력 속에서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 간에 맺어졌다는 정치적 합의를 가리킨다. 이 밀약은 후쿠다가 총재가 되고 오히라가 당무를 담당하며, 2년 후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긴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고 알려졌지만, 후쿠다 측은 이를 부인했다. 1978년 후쿠다가 약속을 어기고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 밀약은 파기되었고, 이는 40일 항쟁으로 이어져 자민당 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켰다. 밀약서의 실재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으며, 2004년 공개된 각서의 진위 여부 또한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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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12월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정치 불안 속에 치러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자유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고 미키 내각이 사퇴했으며, 일본 사회당의 분열, 공명당의 약진, 일본 공산당의 의석 감소, 신자유클럽의 등장 등이 나타난 선거이다. - 1976년 12월 - 1976년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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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정치 불안 속에 치러진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자유민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고 미키 내각이 사퇴했으며, 일본 사회당의 분열, 공명당의 약진, 일본 공산당의 의석 감소, 신자유클럽의 등장 등이 나타난 선거이다. - 1976년 일본 - 록히드 사건
록히드 사건은 1970년대 록히드사가 항공기 판매를 위해 세계 각국 정치인과 군 관계자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한 사건으로, 미국 해외 부패 방지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으며, 서독,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등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이후쿠 밀약 | |
---|---|
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197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선거 종류 | 총재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7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년도 | 1974년 |
다음 선거 |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다음 선거 년도 | 1978년 |
선거 날짜 | 1976년 12월 23일 |
선거 제도 | 양원 의원 총회에 의한 선출 |
'무투표' | style: color:red 내용: 무투표 |
후보 정보 | |
![]() | |
후보 1 이름 | 후쿠다 다케오 |
후보 1 색상 | 556B2F |
총재 정보 | |
선거 전 총재 | 미키 다케오 |
선거 후 총재 | 후쿠다 다케오 |
관련 정보 |
2. 경위와 내용
다이후쿠 밀약은 비밀리에 합의된 내용이라서 경위와 내용에 대해 주장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1976년, 미키 다케오 총재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를 구속하자, 이에 반발한 비주류 파벌이 미키 끌어내리기를 시도했다.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는 호리 시게루의 중재 하에 호텔 퍼시픽 도쿄에서 밀회를 갖고 권력 이양에 관한 합의를 도출했다.
오히라가 후쿠다에게 총재직을 양보하고 총재 임기를 3년에서 2년으로 줄인 것은, 후쿠다가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양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후쿠다는 2년 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오히라와 대립하였다.
후쿠다와 오히라의 대립은 1979년 총리 지명 투표까지 이어졌다. 야당이 오히라 내각을 불신임하여 중의원을 해산했지만, 자민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후쿠다는 오히라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오히라는 이를 일축했고, 총리 지명 투표에서 자민당 후보가 두 명이 나오는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결선투표 끝에 오히라가 승리했지만, 40일 항쟁으로 불리는 갈등이 이어졌다. 1980년, 오히라 내각이 다시 불신임되자 중의원을 해산했으나, 선거를 앞두고 오히라가 급사하면서 자민당이 대승을 거두며 두 사람의 대립도 끝이 났다.
2. 1. 오히라파의 주장
1976년, 미키 다케오 총재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다나카 가쿠에이를 구속하자, 이에 반발한 비주류 파벌들이 '거당체제확립협의회(거당협)'를 결성하여 미키의 퇴진을 꾀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미키 끌어내리기라고 한다. 이때 미키의 후임으로 유력시된 인물이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였다. 두 사람은 미키를 퇴진시키는 것에는 합의했지만, 누가 후임이 될 지 정하지 못해 시나가와에 있는 호텔 퍼시픽 도쿄에서 두 차례 밀회했다.[2] 사토파에 속하는 호리 시게루가 밀회에 참여하여 중재했는데, 호리는 '오히라가 대장성 선배인 후쿠다에게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고 오히라가 이를 받아들였다. 1976년 10월 27일,[3] 문서를 작성했고, 당사자인 후쿠다, 오히라와 입회자인 소노다 스나오, 스즈키 젠코가 서명과 수결(手決)을 했다(소노다는 인감).[3]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총재 및 총리직에 의욕을 보인 오히라가 후쿠다에게 이를 양보하면서 총재 임기를 3년에서 2년으로 줄인 것은, 일반적으로 후쿠다가 임기 2년을 끝낸 뒤 재선에 나서지 않고 오히라에게 정권을 양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소노다는 2년 뒤 오히라 정권의 수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받은 셈이라고 인식했다고 하며,[4] 스즈키도 암묵적으로 2년 뒤에 오히라에게 양도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합의문에서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것은, 후쿠다가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양도한다'는 문구를 넣을 것을 먼저 제안했지만 오히라가 후쿠다를 믿으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넣지 않았다고 한다.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참패를 기록했고, 12일 뒤 미키는 퇴진했다. 1976년 12월 23일, 밀약에 따라 후쿠다는 무투표로 자민당 총재로 당선됐고, 간사장에 오히라를 지명했다. 다음날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으며, 소노다를 내각관방장관에 기용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뒤 후쿠다는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주길 거부하고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후쿠다는 이때 세간에 떠도는 밀약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후쿠다의 측근인 소노다도 위에서 언급한 밀약은 있지만 정권을 넘기겠다는 합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예비선거에서 후쿠다는 다나카의 지원을 받은 오히라에게 패배했고, 결국 본선거를 사퇴했다.[2] 이때 후쿠다는 "국민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라고 하지만 하늘의 소리에도 이상한 소리가 가끔씩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당시 병상에 있던 호리는 자신의 역부족으로 일어난 일이라며 사과하면서 조정을 포기했다.
2. 2. 후쿠다파의 반박
후쿠다파는 다이후쿠 밀약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밀약이 있었더라도 정권 이양에 대한 명시적인 합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후쿠다 다케오는 밀약의 존재를 부인했으며, 그의 측근인 소노다 스나오도 밀약은 있었지만 정권을 넘기겠다는 합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2]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한 후쿠다는 총재직을 사퇴했고, 오히라가 총리 총재가 되었다.[2]
2. 3.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
1978年自由民主党総裁選挙일본어에서 후쿠다 다케오는 밀약 내용을 부정하며 총재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예비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을 받은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패배했다. 이때 후쿠다는 "국민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라고 하지만 하늘의 소리에도 이상한 소리가 가끔씩 있다"는 말을 남겼다. 결국 후쿠다는 본선거를 사퇴하고 오히라가 총재로 선출되었다.2. 4. 40일 항쟁
1979년,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의 갈등은 총리 지명 투표에서 두 명의 자민당 후보가 경합하는 '40일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는 자민당 내 파벌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일본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등 야3당이 손을 잡고 오히라 내각을 불신임하자 오히라는 중의원을 해산했는데, 자민당의 의석 수가 다시 과반수를 밑돌았다. 후쿠다는 오히라의 사퇴를 요구했지만 오히라는 이를 일축했고, 이에 총리 지명 투표에서 오히라와 후쿠다 등 자민당에서 후보가 두 명이 나오는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결선투표까지 가서야 겨우 오히라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여파는 쉽게 가라앉지 않아 이른바 40일 항쟁을 초래했다.
3. 밀약서의 실재 여부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 간의 권력 이양 합의, 즉 '다이후쿠 밀약'의 존재 여부는 이 밀약의 진실을 규명하는 핵심 쟁점이다. 회담에 참석했던 스즈키 젠코는 밀약서를 보았고, 서명 날인한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고 증언했으며[5], 오히라의 사위 모리타 하지메도 서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3] 반면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 후쿠다 야스오는 밀약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후쿠다 다케오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고 말했다.[3]
3. 1. 밀약서 존재 주장
오히라 마사요시의 측근이었던 스즈키 젠코는 회담에 입회하여 "그것(밀약)을 문장으로 하여 서명 날인한 것이 어딘가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말했고[5], 오히라의 사위인 모리타 하지메도 "서면을 봤다"고 주장하는 등[3] 오히라파 의원들은 밀약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반면,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 후쿠다 야스오는 "그런 것은 없었다. 어떤 사람(소노다 나오)의 발언 하나로 순식간에 진짜인 것처럼 퍼졌을 뿐이다. 후쿠다 (다케오)도 확실히 없다고 말했다"며[3] 밀약 자체를 부정했다.
2004년 주간지 요미우리 위클리는 '다이후쿠 밀약 각서'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 각서는 소노다 나오의 차남 소노다 히로유키가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굉지회(홍지회) 편지지에 '후쿠다·오히라 양해 사항'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산케이 신문의 이마호리 모리미치는 공개된 각서에 대해 서명의 필적이 모두 같으며 수결이 후쿠다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겨 소노다 히로유키를 취재했다. 그 결과, 각서를 보관했던 것은 소노다 나오의 아내이자 히로유키의 어머니였고 히로유키 자신도 이 각서를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한 히로유키는 각서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아 이마호리가 취재를 할 당시에는 이미 분실한 뒤였다고 한다.[4][7]
3. 2. 밀약서 존재 부정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 후쿠다 야스오는 밀약 자체를 부정하며, "그런 것은 없었다. 어떤 사람(소노다 나오)이 발언한 것으로 일순간에 진짜처럼 퍼졌을 뿐이다. 후쿠다(다케오)도 분명히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3] 그는 "후쿠다(다케오) 정권은 순조롭게 실적을 올리고 있었고, 바뀌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후쿠다는 '양보할 때는 오히라 씨'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 문제도 있어서 언제까지나 총리를 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6] (1978년 총재 선거 시점에서 후쿠다는 73세, 오히라는 68세).2004년 주간지 요미우리 위클리는 "다이후쿠 밀약의 각서"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 문서는 소노다 나오의 차남인 소노다 히로유키가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굉지회의 편철에 "후쿠다·오히라 양해 사항"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산케이 신문의 이마호리 모리미치는 서명의 필적이 모두 같다는 점과 수결이 후쿠다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하여 소노다 히로유키를 취재했다. 그 결과, 문서는 소노다 나오의 아내였던 소노다 테루미쓰가 보관하고 있었고, 히로유키 자신도 이 문서를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밝혀졌다. 또한 히로유키는 문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마호리의 취재 당시에는 이미 분실된 상태였다.[4][7]
3. 3. 요미우리 위클리의 보도와 그 이후
2004년 주간지 요미우리 위클리가 "다이후쿠 밀약 각서"의 내용을 공개했다. 이 문서는 소노다 나오의 차남 소노다 히로유키가 소지하고 있던 것으로, 굉지회 편지지에 "후쿠다·오히라 양해 사항"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산케이 신문의 이마호리 모리미치는 서명의 필적이 모두 같으며 수결(화압)이 후쿠다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심했다. 이마호리 모리미치가 소노다 히로유키를 취재한 결과, 해당 문서는 소노다 나오의 아내 소노다 테루미쓰가 보관하고 있었고, 소노다 히로유키는 이 문서를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아 분실했다는 점이 드러났다.[4][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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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元総理鈴木善幸 激動の日本政治を語る 戦後40年の検証
IBC岩手放送
199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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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孫が語る昭和の首相】(4)福田康夫氏が父・福田赳夫を語る…「金権」を否定し、「質素」を通した『勝者』 “大福密約”は「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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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デスクノート】“大福密約”はあったのか 「覚書」所持していた園田博之氏の証言は(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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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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